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자의 난 (문단 편집) === [[현대그룹]] (2000) === [[현대그룹]]의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고 [[정주영]]의 아들들이 벌인 싸움을 가리킨다. 정주영의 별명이 [[왕회장|'''왕'''회장]]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도 있어보인다. 국내 재벌가 왕자의 난 중엔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보니 지금도 재벌가 왕자의 난하면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후술된 롯데 2차 왕자의 난도 많이 유명해지긴 했다.] 이는 한때 재계 1위에 등극한 굴지의 대기업이었지만[* 현대그룹 자체의 성과도 있었지만, 현대와 1위를 다투던 [[삼성그룹]]이 1987년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그룹]]/[[제일제당그룹]]/[[새한그룹]]/[[한솔그룹]]/[[신세계그룹]] 등으로 나뉘면서 삼성그룹 자체가 작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경영권을 둘러싸고 아들들이 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 거대한 기업 제국이었던 현대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어 여러 개로 나눠진 것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로 위 항목의 삼성그룹의 왕자의 난은 너무나 오래 전 이야기이기도 해서 와닿는 사람이 적은 반면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은 불과 20년전이라 실제로 그 과정을 메스컴을 통해 접한 사람이 현재에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차남]]인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과[* 1982년, 정주영의 장남이자 정몽구의 형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정몽구 회장이 실질적으로 장남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정몽필은 생전에 아들이 없었고 딸만 둘이었다.] 5남인 [[정몽헌]]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3월 14일 밤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속보직시킨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그룹 일원이자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었다. 사실 당시 [[정몽구]] [[현대자동차|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을, 정몽헌 회장은 [[건설]]·[[전자]]·[[증권]] 부문을 가져갈 예정이었다. 고로 이대로 나뉘면 별 탈이 없는 문제였으나, 사실 장남의 사망 이후 차남으로써 실질적인 장남의 위치에 있는데다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압구정 현대 특혜분양 사건]] 당시 아버지 대신 총대를 매고 옥살이[*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었으나, 시대가 [[박정희 정부|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 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본인 입장에선 그래도 책임을 뒤집어 쓴 거긴 하다.]까지 했을 정도로 그룹을 위해 나름 헌신해왔다고 생각하던 정몽구는 자동차 산업만 물려받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정몽구도 딱히 할 말은 없는 게, 현대차부터가 정몽구랑 큰 연이 없던 회사였다. '포니정'이라는 별명에서 보듯이 현대차는 1967년 설립부터 1996년 퇴임까지 정주영의 친동생인 [[정세영]] 회장이 일궈낸 회사였고, 1999년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명령에 따라 조카 정몽구가 이어받았으니 왕자의 난 시점에서는 정몽구의 손에 들어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자동차를 뺏어서 주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은 것을 알았던터라 현대정공이나 현대자동차서비스 등의 연관 업체를 정몽구가 직접 키우게 했고, 1999년에 기아자동차 인수 문제나 정세영 회장의 경영권 사수 시도를 두고 쿠데타로 간주하여 축출해버린 것이다. --진짜 왕자의 난은 여기였네.--] 오늘날이야 현대하면 [[자동차]]지만, 이때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보다 위상이 많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도 현대차는 국내에선 나름 위상이 있었지만(부도 후 갓 현대그룹에 [[기아]]가 합류한 후에야 현대자동차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다.), 현대건설은 현대의 모체라는 상징성이 있고, 현대전자 역시 당시만 해도 LG반도체를 통합해서 [[삼성전자]]를 맹추격하던 상황이었기에 현대차가 비빌 수준은 아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경영 능력이 두드러졌던 [[정몽헌]]을 아끼며 이 두 회사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다.[* 정주영은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이 평생의 컴플렉스였다. 그래서 학구파 기질이 강했던 정몽헌과 정몽준을 아낀 반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현장에서 발로 뛰는 스타일의 정몽구를 탐탁치 않아 했다.] 이에 [[자동차]] 하나만으로는 향후 성장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튼 정몽구의 기습에,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자신의 측근이자 아버지의 가신그룹인 이익치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한다. 이에 정몽구는 26일 아버지를 만나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가신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고령과 병세 악화로 경영 일에선 손을 떼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자식들의 불화에 별 수 없이 개입하게 된다.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일단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되는듯 했다. 이후 그룹 회장직을 잃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9월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실시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든다. 허나 정몽헌 진영은 5월 25일 정 전 명예회장의 지분을 정몽구의 현대자동차로 이동시키는 '거사'를 결행했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2000년 5월 31일 "본인과 정몽구, 몽헌 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고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에 전념한다"고 발표했다. 세계적 흐름과 여건상 각 기업들이 독자적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향후 국제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퇴진 사유를 밝힌 정주영 회장의 발표 직후 정몽구 회장은 이것은 정몽헌 측의 음모라며 거부 입장을 밝혔고, 반대로 정몽헌 회장은 6월 1일 현대아산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84461|#]] 허나 이렇게 그룹이 내분으로 개판이 나다보니 현대를 향한 시장의 불신도는 높아져갔고, 워크아웃설 등이 난무하며 이는 치명적이게도 신용등급 하락을 자초해 특히 현대건설에 유동성 위기를 불러온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형제간 분쟁이 현대건설의 자금위기라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른 것'''이다. 결국 얼마 안가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상징인 현대건설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아 휘청거리고[* 오죽하면 정부까지 나서서 몽구, 몽헌 형제의 화해를 중재할 정도였다.] 12월 정몽헌 회장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현대건설만 경영 복귀를 한다고 선언한다.[* 참고로 정주영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1년 8월,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현대전자도 외환위기 당시 [[한화투자증권(1982년)|국민투자신탁증권]] 인수에 동원되고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2000년과 2001년, [[닷컴 버블]] 붕괴로 반도체 시장이 불황을 맞자 빚 10조 원을 지고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가버린다.[* 이후 현대전자는 채권단에 의해 [[하이닉스]], [[매그나칩]], [[하이디스]] 등으로 분리되어 팔려나가거나 폐업한다.] 심지어 정몽헌 회장 본인도 아버지의 숙원사업이었던 대북사업 관련해 4억 5,000만 달러(약 5,000억 원)를 [[북한]]에 은밀히 송금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투신자살]]하고 만다.[* 이때 정몽구 회장은 빈소를 지키며 연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측근들은 정몽구가 정몽헌과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밝혔지만, 가족 회의에선 화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정몽구가 외면했다며 한 유족이 정몽구 회장을 나무란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정몽헌과 친했던 정몽준도 꽤나 섭섭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두 사람의 왕자의 난 때 형제친척들은 대부분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다만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한창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동생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이후 동생의 장례식에서 상주를 자처했다.(이건 정몽헌의 장남이 미성년자였던 것도 원인)] 이후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사세를 키워 재계 서열 2위 자리를 굳힌다.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며 한국 최대 기업 제국이었던 현대그룹은 현재의 [[현대그룹]]([[현정은]] - 5남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대자동차그룹]](차남 [[정몽구]]), [[현대중공업]](6남 [[정몽준]]), [[현대백화점]]([[정지선(기업인)|정지선]] - 3남 [[정몽근]] 회장의 장남), [[현대해상]](7남 [[정몽윤]]), 현대기술투자(8남 [[정몽일]])[* 다만 현대기술투자는 사실상 정몽준이 가지고 있었고, 정몽일은 경영만 맡았던 상황이었다. 이후 2016년에 현대중공업이 지주회사 체제로 돌아서면서 정몽일은 현대기술투자를 받아서 분가했다.] 등 몇 덩어리로 갈라져 버렸다. 이 쪼개진 그룹과 집안은 2010년 발생한 [[현대건설]][* [[현대그룹]]의 모체로서, [[현대그룹]]의 정식 계승자라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는 이 곳을 인수할 필요가 있었다.] 인수전이라는 개판 집안 싸움의 원인이 된다. 자금력에서 열세였던 현대그룹이 훨씬 높은 입찰가를 제시해 우선협상대상자가 됐으나, 언론과 정치권에서 자금 조달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다소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가 박탈된다. 그리고 '''승자는 [[정몽구]] 명예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이 된다. 정몽구 회장은 2011년 4월 1일, 계동 현대 사옥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에게 "감개무량하다. 11년 만이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사실 현대그룹 계동 사옥은 현대중공업이 5개층을, 현대자동차가 10개층을 나눠서 소유했지만, 막상 그룹의 정통성과도 같았던 현대건설 자체는 소유하지 않았던 데다가 본인도 껄끄러운 기억이 있어서 오지 않았다. 이후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11년 만에 계동사옥에 맘 편히 들어선 것이다.] [[고우영]] 화백이 수레바퀴에서 살짝 패러디하기도 했다. 2022년 기준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은 '''재계 3위''',[* 2021년까지는 2위였다.] [[현대중공업]]은 '''재계 9위''', [[현대백화점]]은 '''재계 24위''', [[현대해상]]은 '''중견기업''', [[현대그룹]]은 '''중견기업'''[* [[현정은]] 회장 체제에서 현대건설 인수를 실패하기는 했지만 [[현대엘리베이터]] - [[현대상선]] - [[현대증권]] 3축을 중심으로 운영이 이뤄졌다. 그러나 현대상선이 해운업계 불황으로 휘청거렸고 현대증권도 그 과정에서 빠져나갔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